p50
나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말을, 의로운 이들이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살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수동적인 의로움이며, 이 의로움에 따라 하느님은 신앙을 통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성경에 '믿음으로 의로운 자들은 살리라' (하박쿡2:4)라고 쓰인 그대로다. 나는 내가 완전히 다시 태어나, 열린 문들을 통해 낙원에 들어갔다고 느꼈다.
p75
루터는 또한 성경의 많은 부분, 특히 그와 다른 수도승들이 날마다 노래했던 시편을 외워 알고 있었다. 그는 34년 걸쳐 성경 안의 여러 책들에 관해 강의했으며, 자신의 기억에서 끌어와 인용한 성경 구절의 상호 참조들이 강의 안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인용들은 히브리어든, 그리스어나 라틴어든, 또는 독일어든 정확히 성경 구절 그대로는 아니었다. 실제로,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면서 한구절의 의미를 강화하고자 원문에 단어 하나 더하는 일을 꺼리지 않았다. 논쟁이 되는 뚜렷한 예는 로마서 3장 28절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덧붙인 것이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단어를 추가 한 데 대한 비판에 대응해, 루터는 그것이 다만 본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일 뿐 아니라 훌륭한 독일어이며 번역한 문장을 더 명확하고 박력 있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했다. 번역본은 그리스어나 라틴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되어 있어야 하므로, 번역자는 라틴어 원문에 대고 어떻게 훌륭한 독일어를 할 수 있는지 물을 게 아니라, '집에 있는 아이 엄마, 길에 있는 아이들, 장터에 있는 보통 사람들에게' 지도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p131
그 땅을 산 뒤, 루터는 그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몸은 비텐베르크에서 머물고 있으나 영혼은 쵤스도르프에서 살고 계신 부유한 여주인 카타리나 루터 부인, 내 사랑하는 이에게' 라며 장난스레 그녀를 부르고 있다. 1540년, 루터는 카타리나에게 주는 선물로 정교한 조각 장식을 자신들의 집 현관에 설치하게 했으며,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카타리나의 문 Katharineneportal이다.
pp133-134
내 소중한 딸 막달레나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에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을 자네가 이미 전해 받았으리라 생각하네. 나와 내 아내는 막달레나가 이 육체와, 이 세계와, 튀르크인들과 악마의 힘에서 벗어났으며, 그토록 행복한 출발과 축복받은 결말이 이르렀음을 기뻐하며 감사를 드려야 할 걸세. 그러나 우리의 자연적인 사람의 힘이 너무나도 커서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울고 슬퍼하지 않고서는, 또는 우리 자신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네.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던 딸아이의 생김새와 말과 몸짓 들이 가슴 깊이 묻혀 남아 있다네. 그리스도의 죽음조차도 (......) 그렇게 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릴 수는 없을 것이네. 그러니, 자네가 우리를 대신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주게. 참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육신을 이렇게 영광스럽게 해 주셨을 때 우리에게 은총의 위대한 일을 해주셨던 것이기 때문이라네. 막달레나는 (자네도 알다시피) 천성이 순하고 사랑스러워서 모두에게 사랑받았지. (......) 하느님께서 나와 내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의 친구들 모두에게 그런한 죽음을 --아니, 오히려 그러한 삶을 허락하시기를.
p139
고대의 의사들이 결혼이란 자녀와 정절과 사랑 때문에 예찬할 가치가 있다고 설파한 것은 옳았다. 그러나 육체적 유익 또한 소중하며, 결혼의 최고 미덕으로서 칭송받아 마땅하다. 곧, 배우자들은 서로 의지하며, 신뢰하고 자신들이 가진 것 전부를 위탁한다. 그리하여 배우자와 함께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함께하는 것 만큼이나 안전하다.
p145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천사를 숭배하거나 그들에개 기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천사들 덕분에 사람들은 악보다 선을 더 많이 보고, 밤보다 낮이 더욱 밝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죽기보다는 살아가고 있고, 사람들의 집과 공동체가 안전하다는 사실에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다.
p161 그림
8독일의 헤라클레스 모습을 한 루터
p171
예를 들면, 루터는 종교란 개인적인 도덕이 아니라 믿음과 정의에 관한 것이며, 구원을 받기에 충분하게끔 자기 자신을 선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의도에 맞게 다른 이들의 삶을 개선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루터는 신학에서 도덕적 행위와는 다르게 '새로운 종류의 행동'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 자기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종교를 이용하는 것은 우상숭배이며,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가 이러한 죄를 짓고 있다고 비판했다. 우상숭배의 반대는 믿음과 사랑이다. 곧, 하느님을 믿고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그의 의제는 독일을 위해 진정한 그리스도교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므로, 루터가 참된 종교의 형틀을 그리스도교적 내용으로 채워 넣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이는 어느 사회를 위해서든, 특히 종교가 선익을 베풀기보다 해악을 더 많이 저지르는 지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는 곳에서라면 종교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유용할 수 있다. 루터의 유산 중 가장 훌륭한 부분은 근본주의를 멀리한 것과, 종교란 다만 신들을 달래어 그들의 호의를 얻는 수단이 아니라 이 세상과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이기적인 욕망들보다 우위에 둘 것을 항시 상기시켜주는 것이라 주장한 점이다.
pp174-175:
옮긴이: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개혁을 위한 시도들이 계속해서 있어왔고, 그는 다만 때가 무르익었던 절묘한 시점에 '95개 논제'를 들고 나와 준비된 기름통에 불꽃을 튀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대문자로 쓰는 단일한 종교개혁 Reformation보다는 소문자로 쓰는 종교개혁 reformations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루터 이전에도 개혁가들은 있었고, 루터와 동시대에 그와 경쟁한 여러 개혁가들이 나왔으며, 로마카톨릭교회 내부에서도 개혁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복수의 '종교개혁들'이란 관점에서 루터를 바라볼 때 우리는 과도하게 덧씌워진 이미지들을 걷어내고 그를 공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여러가지로 모순된 인물처럼 보인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수도자였다가 결혼했다거나, 폭력 사용에 반대했다가 용인하게 되었다거나, 농민들 편에 섰다가 영주들 편을 들었다거나, 고결한 신앙생활을 강조하면서도 자신의 적수들에게는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는 점들을 들어 그를 조롱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주목해야 할 유의미한 모순은 오히려 그가 지닌 사상 속에 있다. 그는 바오로를 다시 발견하고 아우구스티누스를 독자적으로 계승하면서 의례보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억압적인 지배종교가 되어버린 중세의 로마카톨릭교회에서 개인을 해방시켰다. 이제 각 개인은 누군가의 중재 없이도 스스로 신을 대면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굉장히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유지되었던 이성적 사유를 억압하고, '오직 은총'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의지가 지닌 함의를 축소시켰으며 '오직 성경'을 강조함으써 성경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적 성향의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개혁가였지만 오히려 보수적이었고 전근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도 루터와 함께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p175
번역하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수도자 신분에서 벗어나는 변화를 겪었다. 참된 진리와 옳은 가치를 추구하면서, 단절됐지만 또 연속된 삶을 살아낸 세 사람이 내게 위안이 되었다. 그 위안은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신을 추구했다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신을 추구하는 삶에서도 온갖 모순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현실에 발 붙이고 절대 진리를 추구하며 열정적으로 살아간 세 사람의 사상과 인생이 지적 즐거움과 삶의 위안으로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