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의 박력 넘치는 일상" 뛰어난 그림책 작가이자 에세이스트, 일본의 '국민 시인' 다니카와 슌타로를 남편으로 두었던 사람, 특이하고 까다로운 예술가 사노 요코. 요리방송에 소개된 꽁치 오렌지 주스 영양밥이 얼마나 끔찍한 요리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직접 만들어 보고, 미용실에 가서 암환자임을 당당히 밝히며 까까머리 동자승처럼 확 밀어달라고 하고, <겨울 연가>에 빠져 욘사마가 묵었던 호텔방을 예약하곤 뿌듯해하고, 암 수술 직후에도 담배를 피우고, 시한부 선고를 받고 바로 재규어를 산다.
시크한 작가는 <사는 게 뭐라고>를 통해 간결한 문체로 시원시원하게 유쾌한 일상을 들려주면서도 건망증이 심해지고 암에 걸리는 등 심신 상태가 나쁘다고 거침없이 호소하기도 한다. 읽는 동안 우울해질 법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박력 넘치는 모습에 통쾌하게 웃을 수 있다. 호기심 많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며, 죽음에 초연한 그녀처럼 나이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품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산문집.
p. 40: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엽란 사건은 잊히지 않는 풍경과 추억으로 남았다. 만약 알루미늄포일로 끝냈더라면 그해 섣달그믐의 눈 내린 산길도 못 봤을 테고, 요요코와 내가 적진을 탐색하는 병사처럼 한마음 한뜻으로 "엽란, 엽란" 하며 임무에 목숨 걸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토도 가쓰라 산시처럼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며 웃을 일은 없었겠지. 앞으로 평생 동안 엽란을 볼 때마다 폭설이 내린 산길이 떠오를 테지.
p. 50-51: 설날 아침,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천장에 메밀국수가 두세 가닥 달라붙어 늘어져 있었다. 어린애는 솔직하다. 나는 차마 소리 내어 웃지는 못했지만 마음껏 웃고 싶었다. 그날 이후 섣달그믐이 돌아올 때마다 천장의 메밀국수가 생각나서 웃음이 터졌다. 이따금씩 바닥을 구르며 웃고 싶어진다. 어린애였던 나는 그때, 가장 비참한 것 속에 익살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메밀국수 두세 가닥은 어떻게 천장까지 날아간 걸까?
p. 69: 반찬 코너의 아줌마 무리를 징집하면 강인하면서도 결코 포기를 모르는 훌륭한 부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소란스러운 아줌마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평화주의자일 테니, 역시 세상일이라는 게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나 보다. 누구를 만족시키는지는 모르겠지만.
p. 87-88: 언젠가 나는 어째서 이 모양일까, 하고 탄식하자 열세 살짜리 남자애가 나를 위로했다. "그래서 가정식은 질리지 않는 거래요. 또 여자들은 체온이 매일 변하니까 맛도 미묘하게 변한대요." 어찌나 착한 아이인지. "그런 건 어디에서 배웠어?" "요전에 학교에서 배웠어요." 흠. 요전에 성교육을 받은 모양이다. 세련된 예를 드는 선생이지 뭔가.
p. 108: 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충치 하나 없었다. 상아색을 띤, 투명하게 빛나는 훌륭한 이였다. 맥주병 마개 같은 건 이로 뽑았다. 그런 아버지의 이가 그대로 화장터에서 재로 흩어졌다고 생각하면 분하다.
p. 178-179: 치매 환자를 두고 예전의 훌륭한 그가 아니다, 인격이 바뀌었다,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변했다고들 하지만, 모든 것을 잊어버린 주름투성이의 갓난아기 같은 엄마를 외계인이라고는 여길 수 없다. 갓난아기로 태어나 어른이 되었고, 아기를 낳아 기르고, 화내고 울고 고함치고 웃고,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며느리와 서로 으르렁거렸던 엄마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엄마는 역시 같은 사람이다. 기저귀를 갈 때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거뭇거뭇한 주름투성이의 이상한 형태를 보면 '이 엉덩이로 아기를 일곱이나 낳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의 엉덩이가 아니다. 엄마의 뇌도 엉덩이처럼 이상하게 생겼을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뇌와 몸으로 사랑을 했고, 이 뇌로 하찮거나 심각한 거짓말도 했고, 노래도 불렀다. 외계인의 뇌가 아닌 인간의 뇌다.
p. 251: 사노 씨의 책을 읽으면 언제나 산다는 건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심플한 진실만이 제시되어 있는 사노 씨의 작품을 읽으면 '인생은 번거롭고 힘들지만 밥을 먹고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의 힘으로 밥을 지어 먹고 싶어지지요. 진정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책이란 이런 책을 일컫는게 아닐까요? '섹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둥, '활기차게 살아가야 한다'는 둥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 책이 아닌, 밥을 지어 먹자는 생각이 드는 책. 그리고 살아 있으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 그대로 저는 사노 씨가 좀 더 살아 있었으면 합니다. "나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까운 친구는 절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죽음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 찾아올 때 의미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