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아직 책을 펼치지도 않았지만, 내용을 알 것 같았다. 감정에 치우친 ‘급진적 평등주의자’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이 책도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가 OECD 국가 중에 가장 크다, 와 같은 통계들을 선택적으로 인용하여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금은 언짢은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글쓴이는 혐오표현 토론회에서 결정장애라는 말을 썼던 일로 첫 장을 시작한다. 누군가 글쓴이에게 왜 그런 표현을 썼냐고 묻자, 글쓴이는 곧바로 사과를 하며 동시에 많은 것이 이해되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예상외로 책은 글쓴이가 본인도 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해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아직 결정장애라는 말이 왜 혐오표현인지 잘 와 닿지는 않았지만, 책을 읽는 동안만은 글쓴이의 말에 마음을 열고 경청하기로 했다. 나 또한 원래의 생각에서 서서히 그 반대로 바뀐 경험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스스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러했을, 글쓴이가 그런 본인도 차별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용기 내어 고백해주었다. 덕분에, 나도 그의 말을 진심으로 들을 준비가 되었다. 어쩌면 내가 또 다른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것은 아닐지 반성하면서 책을 읽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차별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많을 뿐. 사람들은 그것이 차별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차별을 행한다. 글쓴이는 이들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 부른다. 언뜻 모순되는 말 같지만 문제를 정확히 꼬집는 말이다. 혐오 사회라고들 한다. 혐오의 말이 너무 많다. 인터넷상에서 종종 보이는 특정 집단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는 사실 사회 내면에 깊숙이 스며든 감정 중 일부의 표출이었던 걸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혐오 표현을 아무렇지 않게 쓴다. 흔한 예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인 ‘병신’이 있다. 고백하자면, 나도 자주 쓰던 표현이다. 스스로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소해 보이는 단어 하나에서 장애인을 비하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드러났다. 이렇듯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차별은 생각보다 더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었다.
차별. 어렵고 흥미로운 주제이다. 그랬기에 책은 금방 읽었다. 책을 덮으며 나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기분에 빠졌다. 여성 할당제, 난민 수용에 관한 견해 등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몇몇 문제들은 차치하고,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이하 PC주의)을 지지하는 글쓴이와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 양측 모두가 타당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책에 인용된 통계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통계가 그렇게 나오게 된 원인도 제법 심층적으로 분석되었다. 한 예로 성별 임금격차가 왜 벌어지게 되었는지 전공계열별 성비를 따져 설명하였고, 여기서 알 수 있는 구조적 차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차별적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 여학생의 수학 성적이 더 낮았다는 연구 결과는 이를 뒷받침한다.
나는 이 ‘차별’이라는 주제에 대해 더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찾아본 것은 조던 피터슨 교수와 페미니스트 앵커의 토론이었다. 이후 피터슨 교수의 강의를 몇 개 더 찾아 청강하였다. 차별에 관한 자료들을 더 찾아보면서, 나는 이 책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책의 2장 ‘우리는 한 곳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에서 글쓴이는 개인은 여러 가지 범주에 속하고, 각각의 범주에서 차별을 당하기도, 행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차별을 하는 사람과 차별을 당하는 사람, 이분법적으로 나눈 사고에서 한 단계 나아간 생각이다. 당연한 말이고, 여전히 동의한다. 하지만 이 말을 기반으로 펼쳐나가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책을 읽던 당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대목이다.
이 대목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한 사람. 어느 공동체의 구성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빠져있다. 앞선 ‘차별을 하는 사람과 차별을 당하는 사람, 이분법적으로 나눈 사고에서 한 단계 나아간 생각’이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세상을 한 층 더 복합적으로 보려 했다는 점에선 나아간 생각임이 맞지만, 그 또한 본질적으로 이분법적 사고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개인은 배제하고, 세상을 집단 간의 전쟁으로 보는 이 시각은 너무나 단편적이다.
한 예로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있다. 글쓴이는 싫어할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말한다.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는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 그 자체인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모두에게 공평하게 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교사도 교사이기 이전에 한 사람이다. 한 사람이 자신을 괴롭게 하는 다른 사람에 대해 ‘싫다’고 표현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는 교사의 권력을 휘두른 기득권자, 악인일 뿐인가? 그렇다면 학생이 어떤 교사를 ‘싫다’고 표현한 상황은 어떨까. 이 경우 권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일이 아닌가? 아니, 책에서 말했듯 권력관계를 뒤집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인가? 이것은 두 사람의 갈등을 살피지 않고, 당사자들은 배제한 채 오직 집단 간의 문제로만 치부해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이다.
즉, 이런 관점은 책의 소제목에서도 나와있듯이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는 단순한 방식’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두 계급의 투쟁으로 보아 이분법적이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PC주의는 공산주의처럼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편견을 갖지 않고, 성급한 일반화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는 글쓴이가 되려 성급한 일반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통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세상에는 세 가지 종류의 거짓말이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라는 말이 있다.9 통계라는 것이 때로 진실을 왜곡하여 거짓말의 도구가 되기도 하므로 생겨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통계의 오류에 현혹되지 않고 통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
성별 임금 격차에 대해 다시 논의해보자. 글쓴이는 전공계열별 성비를 근거로 우리 사회에 구조적 차별이 만연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아예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공계열별 성비 차이가 나타나게 된 원인이 오직 구조적 차별에만 있을까? 사실에 더 근접하게 접근하기 위해 다른 통계도 살펴보자. 통계에 따르면 성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일수록 이공계 여성 비율이 오히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 평등을 위해 어느 국가들보다 노력한 나라, 스칸디나비아의 사례에서 성 평등의 역설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남성과 여성은 다르다. 남성의 뇌 구조는 감각인지와 통합 행동에 어울리며, 여성의 뇌 구조는 기억과 직관, 사회성에 더 적합하다. 글쓴이는 이러한 남녀의 기본적인 생물학적 차이조차 배제하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다른 질문을 해보겠다. 남녀로 나누어 통계하고, 나타난 결과를 성차별로만 설명하려는 시도는 적절한가? 기회의 평등은 당연히 모두에게 주어져야 하고, 사회가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의 평등은 그렇지 않다.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나타난 결과는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나는 앞선 글에서 사회는 글쓴이가 보는 것만큼 차별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사회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켄드릭 라마의 「To Pimp A Butterfly」를 들으며 여전히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에 대해 생각해본다. 여전히 상처 받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문득 3년 전의 일이 떠오른다. 반 친구들이 겨울왕국 2에서 엘사가 동성애자로 나올 거라는 소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겨울왕국 2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볼 텐데... 좀 그렇지 않아?’라고 말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다만 사랑의 한 형태일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그때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악의 없는 차별, 앞선 글 내내 글쓴이를 비판했지만, 책의 전반적인 주제인 악의 없는 차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는 사회의 모두가 함께 고쳐나가야 할 문제이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가능한가?’와 같은 회의적인 질문은 제쳐두고, 평등은 분명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값진 가치 중 하나이다. 차별을 없애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의미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 과정은 평화적이어야 할 것이다.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하기보다 우리 안에 도사린 혐오를 서서히 정화해나가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세상을 단순하고 폭력적인 것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다수자에 속하는 모든 사람이 소수자를 억압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악의적인 통계 해석은 그만두어야 한다. 엠마 왓슨이 말했듯이, 오늘날 평등을 외치는 흐름은 자유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견에서 벗어날 자유. 더 자유로워질 자유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몽둥이가 되어선 안 된다. 아직 하지 못한 말이 많다. 차별은 심오한 주제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내가 지금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서 잘못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선택하겠다. 진실의 추구를 위해서. 내 말이 설령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해서라도 나는 말하겠다. 나는 이제 슬슬 마무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거 급진적 페미니스트였지만 남성 권리 운동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생각을 바꾸게 된 ‘The Red Pill’의 제작자 캐시 제이의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우리는 미리 화낼 준비부터 하고 보는 태도를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로, 열린 마음으로 성실하게 상대의 말을 경청하길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더 나은 이해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가지고요. 해결방안은 향해 함께 노력하면서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배에 탄 운명이니까요.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마침내 전적으로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Great read, my first time reading a work translated into Japanese as well as first non-fiction book in Japanese.
This book randomly came up to me on Amazon and I was intrigued by the title. If I translate it roughly, it's basically that "Even people with good intentions discriminate sometimes," so you can already tell it's going to be interesting just from that.
Kim Ji-Hye (hope I am romanizing that right, please correct me if not) does an excellent job illustrating how racism and discrimination seeps into our everyday lives without us even realizing. How, even when we make plans to combat discrimination, we are rarely successful. The examples and research brought up in every chapter do an excellent job at illustrating their points, and it was satisfying seeing almost every chapter loop back to the first real-world situation given in each.
Definitely agree with others who think it should be required reading. Hope an English version is released someday.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동성애자를 품는다는 것이 위협이며 신앙의 타협처럼 여겨진다. 성매매여성, 장애인, 범죄자(수감자)에게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지만 동성애자를 품으면 “죄인을 용서한다”가 아닌 “죄를 용납한다”라고 생각한다. 차별금지법 또한 동의하면 더 이상 “성경은 동성애가 죄다”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가르칠 수 없게 된다고 믿는다. 실제 미국의 일부 입양 기관은 입양 희망 가정을 인터뷰할 때 이러한 견해를 비치면 아이들에게 “차별을 가르친다”고 여겨 입양을 불허하거나 심지어 기존 자녀들마저 부모로부터 격리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신앙을 지킬 수 없는 환경이 되어가고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에겐 역차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유독 동성애자에게만 손가락질하며 “넌 죄인이야”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왜 그래야만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동성애 차별과 관련된 이 문제는 내가 예수를 주로 믿기 때문에 고민하는 문제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그 외에 간과해 오던 차별 문제들도 발견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PC를 교육받았기에 노골적인 차별이나 name calling 등은 하지 않는다. 나 또한 미국에서 차별을 받은 경험이 있고, 웃기기도 한국에서도 “외국물 먹은 여자”로서 차별 받은 적도 있다. 그럼에도 나 또한 자라면서 외국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특권과 경제적 여유를 누렸다. 그렇기에 다른 환경의, 다른 사고방식의 사람을 차별하는 생각을 해 왔으며, 나보다 더 경제적 여유가 있던 누군가를 재단하기도 했다. 부끄럽고 마주하기 싫던 내 모습을 바라보게 해 준 책이며, 동시에 무엇이 정의인가에 관한 정립이 절실하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준 책이다. 좀 더 객관적으로 나와 사회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A non-fiction on prevailing discrimination in South Korea: the author uses the contradictory title to wake people who are blind to discrimination they participate. While reading, I was thinking about a few Korean short stories I've read recently. In the stories, characters feel hurt and continuously churn over their hurt feelings not knowing why. The hurt comes from seemingly so ordinary conversations with family, co-workers and strangers. Wonder whether a lot of those quick, I-wish-you-the best comments are coming from these blinded discrimination.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어떤 말이나 행동이 차별이 되는지 그 행위를 하는 입장에서는 인식하지 못 할 수가 있다."
4.5/5 모순점이 있는 제목에 사로잡혀 얼떨결에 읽은 책. 올해 17살 입장에서 봤을 때 청소년 필독서로 지정해도 무방할 듯 하다. 우리는 어쩌면 매분 매순간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나는 차별을 부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 누군가도 차별 대우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며 착각하고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