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문학 동아리에서 이 작가가 좋다는 말을 어렴풋이 듣고 난 얼마 후에,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책을 읽고 싶었지만 종이책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때라, 전자책을 펼쳐봤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읽었다. 짧은 전체 감상은, 글이 아주 깔쌈해서 시원시원하게 넘어가고 장르도 다양해서 루즈해지지 않는다. 인문학도가 공감할 부분이 많다 (특히 대학원 진학하고 싶거나 적당히 예술병 있는 사람). 뒤로 갈수록 더 좋은 느낌이었다(이건 개인적인 취향 부분이 큼, 장르문학<< 순문학파라)
1. 잠수
무난한 스타트. 김초엽 생각나기도 하고 짧아서 다 읽고 벌써 끝났다고? 싶었다. 상실 후의 시간들.
2. 서재
SF는 어떤 장르보다 현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SF 작가들이 미래를 자주 예측했다며 멋진 신세계와 1984, Fahrenheit 451
개인적인 생각으로 분서의 시대는 지난 듯. 이제 더 설득력 있는 세계관은 책에 뭔가를 써놔도 관심이 없거나 봐도 인터넷을 끊어버리기만 한다면 이해를 못하는 시대. 이제 겉으로 드러나는 통제는. 1984 적 세계관이 아니라 멋진 신세계 세계관에 난 동조.
3. 일곱 페이지
메타적 작품.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중 하나로 골랐다가 더 좋은 작품이 생겨서 다시 내려놨다. 단편이 이어질 때 세계관 보는 재미.
4. 폭수
쓸모없음과 쓸모있음 사이의 다리. 이 작품은 가장 마음에 드는 두 작품 중 하나다. 인터뷰방식을 뒤집어서 인터뷰어가 질문당하는 것도 재밌었고 뭔가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재밌음이었다.
5. 아일랜드
잃어버린 것과 있는 것 사이 다리. 읽으면서 작가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해봤다. 잠수와 마찬가지로 애도의 과정을 그리고 있고 이미지도 좋은데
6. 애틀랜틱 엔딩
죽음과 삶 사이 다리. 가장 좋았던 단편. 헤어질 결심 생각나기도 했는데 영화화해도 좋을 것 같다. 이전엔 sf 적인 글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 단편으로 문지혁 작간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그냥 글 잘 쓰구나 싶은. 길이도 좋았고 석양 지는 바다 묘사하는 것도 굳.
7.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표제작. 이념의 다리와 물성으로서 다리를 이어놓은 글. 크게 두가지 사건을 매듭짓는 다리라는 아야랑 티키타카도 재밌고 마지막에 아야 이름 질문에 답하는 것도 좋았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인문학도다웠던 글. 표제작다웠다.
8. 어떤 선물
무난하게 마무리하기 좋았던. 엔딩 재밌었다.
다 읽고 작가의 저작들 쓱 훑어보니 장르문학 (SF)랑 순문학 쪽으로 갈리는 것 같은데, 난 초급한국어를 다음 읽어볼 거 같다.
_______
[좋았던 구절]
"언제까지라고 했지?”
“이번 주 금요일.”
“일주일 남았네.”
“비즈니스 데이로 치면 오 일이지.”
“잘돼 가?”
“대륙군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래도 도망가지는 마. 조지 워싱턴이 여기서 맞서 싸웠다면 어땠을까?”
“몰살됐겠지, 아마.”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 대화 진짜 훌륭하다
조지 워싱턴조차 포트 리와 포트 워싱턴이 있던 자리에 150년 후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철제 다리가 세워질 거라고는(그리고 두 지점이 정확히 연결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같은 20세기 말에 각각 서울과 도쿄에서 태어난 남녀가 이제 막 그 다리를 두 다리로 걸어서 건널 예정이라는 것도.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소설이란 그런 것일까? 몸을 던지는 장면을 보여주되 실제로는 몸을 던지지 않는? 자살(suicide)이 아닌 스스로의 사형을 집행(self-murder)하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오직 ‘다리 위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그러다 엉뚱한 곳으로 뛰어내려 끝내 검은 물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
아야는 손을 흔들고 몇 걸음 걸어가나 싶더니 뒤돌아 거리를 둔 채 말했다.
“내 이름 있잖아, 무슨 뜻이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데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아야는 이어서 말했다.
“언젠가 한국에서 온 친구가 말해줬어. 한국어로 내 이름은 아프다는 뜻이라고. 맞아?”
이번에는 내가 머뭇거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농담이라 해도 그렇게 말하는 친구와는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한국어로 네 이름은 모음의 시작이야.”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지극히 한국어 강사다운 대답을 했다.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한국어에는 모음이 이렇게 열 갠데 그 첫 두 글자와 발음이 같거든. 한국 사람들이 사는 동안 한번은 외우는 이름이지. 아무도 그걸 아프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야.”
그러자 아야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리가토.”
아야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뭔가를 묻더니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길 건너에 구급차를 닮은 하얀색 스패니시 버스가 승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후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만큼 작아진 아야는 차에 올라탔다. 문을 잡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그녀의 모습은 ‘아’처럼 보였다. (우리가 다리를 건널 때)